[중동] 전쟁과 통역사 : 카불 함락과 미국의 철수
작성자
박유현
작성일
2021-08-17 22:04
조회
743
카불 함락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8월 14일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을 도왔던 아프간인들의 질서 있고 안전한 탈출(an orderly and safe evacuation)을 지시했다. 바이든이 언급한 아프간인 중 많은 이가 미군 통역사일 것으로 보인다. 중동 정서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보통의 아프간 통역사는 계약직 민간인으로 현지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 가장이다. 통역사 한 사람 마다 부양가족 몇 사람씩을 더하면 미군이 책임져야 하는 인원은 그 몇배가 될 것이다.
전장에서 미군이 활용하는 특수언어 요원은 (1) 언어학자 linguist, (2) 통번역병 09L MOS (군사특기), (3) 계약직 통역사(contractor)로 나뉜다. 이중 (1) 언어학자(linguist)는 에니그마 등 독일군 암호를 수학자들과 함께 해독한 언어학자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텍스트의 번역, 정보의 해석 쪽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사실 'linguist'의 번역어는 '학자' 보다는 '요원' 쪽이 더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굳어버린 듯하고, '일본어 담당관'으로 번역된 일본 논문을 본 일이 있다. 2차대전 이후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 있는 국방부 언어교육원에서 언어학자들을 교육한 후 한국 일본 등에 파견했다. 사립 단설 대학(stand-alone university, 우리의 대학원대학교)으로 출발한 몬터레이 통역대학원(현 미들베리 국제대학원)은 이 국방부 언어교육원의 영향으로 이쪽에 자리잡았다고 전해진다.
다음 (2) 통번역병은 2003년 창설된 제51 및 제52 중대 소속이다. 전체 인원은 300명 정도. 이라크전을 거치면서 창설된 부대로 중동에 특화되어 있다. 미군에는 통번역병으로 입대해서 복무하면 국적을 주는 MAVNI 프로그램이 있는데, 한국어는 초기에 포함되었다가 2017년 제외되었다. 그래서 약간 샛길로 빠지자면, 미국 티켓을 노리는 한국 국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주한미군 통역관(민간인)으로 입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시급제로 비록 급여는 작지만, 정시 근무, 조기 퇴근으로 저녁 있는 삶이 가능하고, 20년 정도 근속하면 특별이민을 신청할 수 있어 근래에는 통대 졸업생 중에서도 취업 사례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3) 계약직 통역사(contractor)가 있다. 미군은 민간인을 신원조회를 통과했지만 비밀 취급 인가가 없는 현지 고용인(CAT1), 비밀 취급 인가가 있는 미국 시민(CAT2), 1급 비밀(TS) 또는 군사적 특수정보(SCI) 취급인가가 있는 미국 시민(CAT3)으로 분류해서 고용한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에는 CAT2, CAT3이 거의 없다고 한다. 미국인 지원자가 적고 그나마 지원을 받아 신원조회를 해보면 부적격자가 많기 때문이다. 또 현지인들이 세상 물정 모르는 해외교포를 신뢰하지 않아 민정 사업에 부적합한 면이 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피천득 수필의 아사코 남편을 생각해 보면 납득이 가는 해석이다. 그러다 보니 비록 통역의 외주화가 신자유주의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하지만, 미군의 외주화는 이 수급 사정에 기인하는 바도 큰 듯하다.
그런데 이 통번역회사들의 매출 규모가 대단한 점은 주목할만하다. 어떤 메이저 회사의 경우, 2007년 한 해만 아프간에서 4,500명의 통역사를 고용하고 7억 달러(8천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통역사 1인으로 환산하면 평균 급여가 연봉 15만 달러(1억7천만원), 월급 1만2천5백 달러(1천5백만원)이다. 같은 기간 인터뷰에 응한 미군 통역병의 급여는 월 3-4천 달러대였다. 통역 비용이 지나치게 지출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 상원에서 청문회까지 열렸다. 하지만 미군 소속 통역사는 실제로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 언어학자와 같은 책상물림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하는 일이 작전 현장에서의 심문(interrogation), 노획문서의 문장구역(sight translation, 즉석에서 구술로 번역하는 것) 등이다. 또 폭발물이나 총격에 의해 사망할 수도 있지만, 화기를 소지하지 못한다고. 신뢰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부대 밖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다 보니 반군의 표적이 되기도 쉽다. 실례로 소속 통역사가 4년 동안 200여 명 사망한 회사도 있다.
이렇듯, 군 통역사는 '하는 일에 비해 많이 번다'와 '미국 비자를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비판을 오가면서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 나아가 군 통역사는 전쟁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제네바 협약 등 국제법의 보호 대상이 아니다. 우리 직업군 중에서 한편에 치우쳐 일하면서 당사자 중 하나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는 유일한 집단이다. 지금까지 CAT1을 거쳐 간 사람들이 2-3만 명인데 비자를 받은 사람들이 수백 명대라니, 너무 많은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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