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구소칼럼

[한국] 휴전회담 통역관 설정식의 최후진술

작성자
박유현
작성일
2022-07-27 20:22
조회
563


휴전회담 북측 통역관이었던 설정식(薛貞植·1912~1953)은 연희전문 출신의 시인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을 다녀왔고, 그 인연으로 해방후 1년 정도 미군정 공보처에서 일하던 중 김구 주석이 참여한 남북연석회의 소식에 북한 쪽으로 경도되면서 월북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휴전회담을 2년 꽉 채워 통역하고 휴전 직전 박헌영 사건에 엮이면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미군정과 비밀리에 접촉한 것도 아니고, 미 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으로 정식 근무하다 월북을 한 것일 뿐인데 그 외 여죄 없이 그 이유 만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설정식은 사실 이때 이미 심장수술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사형을 면했다 하더라도 오래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판 기록에서 이강국을 포함한 관련자들의 최후 진술을 보면 다들 고문에 굴했겠다 싶은 항복의 변만 있는데, 설정식이 남긴 진술은 역시 시인이다 싶게 서정적이다. 최후 진술에서 그가 염원했던 사회는 자녀까지는 아니지만 외손주 김보성 배우의 시대에 남측에서 누리게 되었다고 봐야 할 듯. 전문 게재하니 시간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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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유한이 없습니다. 제가 세상을 하직하면서 다만 깨끗이 말씀드리게 되는 것이 고맙습니다. 제 뇌수의 썩은 살올 도려 낼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겠습니다.

예심에서 나의 몇째 동생이나 될만한 어린 예심원 배 동무는 “당신이 미쳤소. 미국놈 국장이 뭐요”하고 가르쳐 주는 데 탄복하여 저는 머리를 못들었습니다. 이 동무는 해방후 자란 일꾼으로서 해방전에는 철도에서 로동하던 동무인데 자기 비판도 할 줄 모르는 저에게 비하여 말할 수 없이 우수한 동무였습니다. 저는 자기 비판조차 할 줄 모르고 그 동무와 처음에는 싸웠습니다.

예심 최초 과정에서는 저는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공화국에 대하여 감사하며 부끄러운 것을 고백하겠습니다. 변호사 변론에서 이 무시무시한 도당의 한 사람인 저를 경하게 취급하였습니다. 말할 수 있다면 발표할 것은 제가 입당시 시를 썼는데 <내 이제 무엇을 근심하리요> 중에서 오늘 원쑤로 된 박 헌영을 념두에 두고 형상화하였는데 그를 수령으로 추대하고 쓴 시였습니다. 저는 3, 4일동안 괴로웠으나 오늘은 좋습니다. 소금에 절인 것 같은 썩은 더러운 제 자신 객관적으로 누가 보든지, 저를 누가 나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1942년 일본 사람 가와카미*의 저서 다이니 빔보 모노가다리*를 읽어 보았을 뿐이고 그 후는 전혀 좌익 서적을 읽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책은 많았으나 6.28 서울 해방후 그것은 모두가 고물상으로 가져가야만 할 것이였습니다. 저의 조카가 남북 련석 회의 때 북조선에 왔다 간 것을 보고 물은즉 우리가 듣던 대로 민주주의의 위력은 무섭다고 하여 북반부를 찬양했을 때 우리는 북반부를 따라가자고 맹세한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멀지 않아 죽지만 아이들이 잘 살만한 사회 우리 인민들이 잘 살수 있는 사회 나의 아이들과 모든 아이들이 잘 살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가 올 것을 믿고 물러가겠습니다.. 저의 범죄는 미국놈의 앞잡이였으며 그의 심부름꾼이였기에 마땅히 처벌을 받겠습니다. (1953.8.6)

* 가와카미 : 가와카미 하지메 (河上肇 1879-1946)
* 다이니 빔보 모노가다리 : 두번째 가난뱅이 이야기 (第二貧乏物語,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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